저는 국민대학교에서 실내디자인을 전공하고 결혼 전까지 실내 공간과 건축 설계, 디자인 작업을 하였습니다. 어릴 적 매우 내성적이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 유일한 놀이였던 아이였습니다. 그림으로 많은 관심과 인정을 받고 자랐지만 부모님의 뜻에 따라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그림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는데요. 늘 가슴 한 켠에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과 헛헛함이 세월이 지날수록 커져만 갔었지요. 무엇 때문에 그토록 공허한지 이유를 모른채 전문직 여성으로서의 경력을 쫓았던것 같습니다. 결혼 전 마지막으로 근무한 건축소 사무소에서 운명처럼 설치 미술 작가님과의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활동 범위를 활발하게 넓혀가시던 작가님의 열정과 에너지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당시 학고재 전시를 준비하시던 작가님을 곁에서 잠시 도와드린 경험이 있는데 아마 그때의 기억들이 제 안에 꾹꾹 눌러 담아온 예술에 대한 열망에 불씨가 되었던것 같습니다. 고객의 니즈에 맞추는 디자이너로의 삶도 의미있고 보람되지만 저는 그보다 제 안의 것에 집중하고 진심을 다하며 열정을 쏟을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 삶을 동경하는 마음이 갈수록 커져만 갔었죠.
결혼과 동시에 배우자를 따라 연고 하나 없는 지방의 작은 시골 마을로 오게되면서 보통의 여성분들처럼 경단녀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지친 심신을 고요한 시골 생활로 치유할 수는 있었지만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는 삶에 회의를 갖게 될 때쯤 출산을 하게 되었어요.
첫째 아이가 통잠을 자게 되면서 제게 주어진 금쪽같은 시간에 수채화를 독학해 보고자 수채 붓과 전용 용지를 샀었는데 그게 수채화 독학의 시작이었습니다. 저는 입시미술도 석고 뎃생과 디자인 실기를 위한 그림만 그려야 했기에 수채화는 배워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채화를 제 힘으로 독학하여 실력을 쌓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계획에 없던 둘째 아이가 생겼고 그즈음부터 가슴 아프게도 첫째 아이가 참 오래도록 아팠습니다. 3~4년 동안 세 번의 수술을 하게 되었던 첫째 아이와 많이 예민하던 둘째 아이를 주변의 도움 없이 혼자서 감당하던 그 시기는 제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장 버겁던 시절이었던것 같아요.
멘탈이 거의 무너져 갈 무렵 우연찮게 보태니컬 아트를 알게 되었습니다. 학문적인 접근으로 정확하게 식물을 그려내는 보태니컬 일러스트 분야부터 예술적인 표현이 가미된 수많은 보태니컬 아트 세계를 알게된 뒤로 제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딘가에 집중하고 몰입하며 간절히 제 자신을 다시 찾고 싶었던 저에게는 운명과 같은 분야였습니다.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아쉬운 마음도 컸지만 이제라도 보태니컬 아트의 세계에 발 담그기로 다짐한 순간부터는 생기를 잃어 시들어가던 거울 속 제 모습은 사라지고 뜨거운 열정이 가슴속에 가득했습니다.
유명 보태니컬 아트 작가님의 작품 세 개를 모작하고 용감하게 창작을 시작하며 보태니컬 아트 공모전에 도전하였습니다. 정말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어려웠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은 수채화 작업을 주로하지만 처음 시작하던 시기에는 수채 색연필로 작업을 하였습니다. 입시미술 준비를 하던 당시에 사용했던 20여년이나 묵은 파버카스텔 색연필의 발색이 뜻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했고 입선을 하게 되었습니다.
혼자서 고군분투하며 이루어낸 성과라 무척 기뻤으나 참 아이러니하게도 공모전 시상식이 열리던 2018년 5월의 오프닝 날이 아이의 세번째 수술전 검사 일정과 겹쳤기에 가장 기쁜 날인 동시에 가장 마음이 고통스러웠던 날로 기억됩니다. 그래서인지 보태니컬 아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그린 첫 작업 꽈리 작품은 많은 사연과 추억이 담겨있어서 저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하고 의미깊은 작품입니다. 첫 번째 공모전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보태니컬 아트를 독학하기로 결심하고 타협회의 공모전에도 차례로 도전을 했고 감사하게도 세번의 공모전에서 모두 수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배움없이 혼자서 작업해 나가던 상황이라 객관적인 평가를 받아보고 싶었고 자존감을 찾고자 도전한 공모전들에서 좋은 결과를 얻으면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도 되찾고 좀 더 용기를 내어 작업에 매진할 수 있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활발하게 작업량을 늘려가며 본격적으로 활동해 보려던 무렵, 남편의 갑작스러운 UAE 주재원 발령이 나면서 아부다비로 오게 되었어요. 제 개인의 목표가 올스톱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사막의 나라라고만 알고 있어서 과연 보태니컬 아트를 하는 제게 마음을 움직이게 할만큼 매력적인 식물 소재가 있을까 반신반의했었는데 우연히 찾아간 알아인 오아시스에서 한그루의 야자나무를 만나면서 새로운 목표가 생겼습니다. 수확철이 지난 알 아인 오아시스에서 데이츠 열매가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나무 한 그루가 인연이 되어 지금의 데이츠 야자나무 시리즈 작업을 하게 되었어요. 사실 이곳 아부다비에서 머물수 있는 기한은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5년 남짓이라 그 기간동안 데이츠 시리즈 작업을 담아 한국으로 돌아간 뒤로도 오래도록 추억으로 간직할 생각으로 시작한 개인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제 인스타 계정을 보고 수개월동안 dm으로 작품 구매를 희망하시며 연락을 하신 로컬 에미라티 컬렉터님에게 첫번째 야자나무 작품을 판매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바이에서 매년 개최되고 있는 어느 협회의 전시회에 한국 엠버서더로 전시회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동안의 전시 경험과는 다른 타 장르와의 전시 경험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 작품을 구입하기 위해 전시회 오프닝 날 직접 오신 컬렉터님과 긴 대화의 시간을 갖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UAE 1세대 작가님의 작품 이야기와 데이츠 나무가 아랍 에미레이츠에서 얼마나 소중한 문화 유산인지도 새롭게 알게 되었어요. 늘 개인 작업공간에서 그림과 씨름만 하던 제게 보다 넓은 시야를 가져다 준 경험이었습니다.
지난해 6월 fellow member로 활동하고 있는 보태니컬 영국 협회 Society of Botanical Artists의 Annual Exhibition을 위해 데이츠 시리즈 작품 no.2, no.3 을 출품하였고 영광스럽게도 시리즈 no.3 작품이 협회장상과 스폰서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값진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온 마음, 온 열정을 다해 긴 시간을 매달리며 그려낸 데이츠 야자나무 작품이 유럽의 저명한 보태니컬 협회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과 예상하지 못했던 수상의 기쁨에 런던에서 열린 프라이빗 전시날 눈물을 펑펑 흘렸었네요.
그리고 무엇보다 보태니컬 아트 작가를 꿈꾸며 저에게 뮤즈와 같은 영국의 유명 작가님이신 빌리 샤월님을 만났던 순간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늘 서적으로 마주하던 분을 한 공간에서 만나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꿈만 같았고, 제게 사인을 부탁하셨던 순간은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할 영광스러운 기억으로 남을것 같습니다. 그때 저에게 협회 회장님을 비롯하여 빌리 샤월 작가님께서 데이츠 야자나무 시리즈 작업을 앞으로도 이어나가길 바란다고 응원해 주셨던 말씀들이 저에게는 시리즈 작업을 이어나가게 된 강력한 동기와 힘이 되었습니다. 현재 시리즈 여섯번째 작품까지 이어오고 있으며 개인적인 목표를 위해 앞으로도 당분간은 작업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볼 생각입니다. 식물 세밀화가인 저에게 이처럼 매력적인 소재를 UAE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건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모두 비슷한 생김새를 띄고 있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제각기 다른 수백여 종의 야자나무에게서 그들 각자의 고유한 형태와 질감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는 식물 관찰이 큰 즐거움이고 수채화 용지에 옮기는 과정속에서 제가 느낀 감동도 함께 담아내는것 또한 목표이고 숙제입니다. 척박한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수많은 열매를 맺는 데이츠 나무의 강인한 생명력도 그림속에 담아내고 싶습니다.
끊임없는 관찰과 높은 집중력으로 깊이 몰입해야만 완성에 다다를 수 있는 작업이기에 그리는 동안은 긴 호흡이 필요한 수행과 같은 작업이지만 동시에 치유와 위로가 되어주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데이츠 야자나무를 그린 작업들이 U A E 현지에서 전시를 하게되는 기회가 생기고 있다는 사실이 참 신기하고 감사함을 많이 느끼는 요즘입니다. 한국 문화원에서 원화를 선보일 수 있게되어 감사하며 또 라스알카이마 국왕님께 작품 설명을 드릴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Q. 본인의 대추야자 첫 번째 야자나무 작품이 두바이 현지 에미라티 고객으로부터 구매되었을 때의 소감이 궁금합니다
A. 시리즈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제가 UAE에 머무는 동안 추억이 담긴 데이츠 야자나무를 그려 개인 소장하기 위해 시작했기에 처음부터 작품 판매의 계획이 없었어요. 긴 시간 과 공을 들이는 만큼 모든 작품이 자식과 같이 소중하기에 원화를 판매하는 것이 저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작업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제 인스타 계정을 보고 수개월 동안 작품 구매를 원하시던 컬렉터 분이 계셨어요. 작년 봄 두바이 전시회가 있던 오프닝 날 그분께서 직접 오셔서 원화를 꼼꼼히 살펴보시며 진심으로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고 쉽지 않은 결정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 주는 의미는 저에게도 분명 남다르기에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저보다 더 작품을 아끼고 사랑해 주시는 분을 만나게 되어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작품을 건네 드렸습니다. 작가의 입장에서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작품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 주시는 컬렉터를 만난다는 게 이 토록 큰 힘이 되고 감사한지 이분을 통해 알게 되었고요. 지금도 변함없이 관심 가져주셔서 그저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Q. 이번 아부다비 한국 문화원과 2023년 라살카이마 파인 아트 페스티벌(RAKFAF) 을 통해서 느낀 소감과 영감이 있다면?
A. 보태니컬 아트 작가로서 지금까지는 소속 협회(SBA)의 전시와 공모전 전시의 기회가 전부였는데 UAE에 온 뒤로 타 장르와 함께 전시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서 신선한 경험을 하며 시야가 넓어짐을 느낍니다. 특히 제가 아부다비에서 직접 촬영하고 그려온 데이츠 야자의 원화 두 작품을 한국 문화원에서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하시는 한국 작가 님들과 함께 전시를 하게 되어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시리즈 1,2,3번을 꼭 한자리에 전시를 하고 싶은 꿈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작품이 로컬 컬렉터님에게 판매가 되어서 이 세 작품을 나란히 전시할 수 있는 기 회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라살카이마 파인 아트 페스티벌에서 인쇄 작업물로 아웃도어 전시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무척 뜻깊고 감사한 경험이었습니다. 더불어 라스 알카이마 국왕님께 오프닝 날 작품에 대한 설명을 짧게나마 드렸던 순간이 오래도록 여운이 남네요. UAE에 거주하는 동안 이곳에서 생장하고 있는 데이츠 야자나무를 가능한 많이 그려보고 싶고, 이번 시리즈 작업이 앞으로의 작업 방향에도 유의미한 변환점이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또한 많은 분들에게 식물 세밀화의 매력적인 세상을 느끼는 기회 를 드릴 수 있도록 보태니컬 아트 전시의 기회가 있기를 꿈꿔봅니다.